여행 트렁크 속 한 권의 책

칼럼

여행 트렁크 속 한 권의 책

여행지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

『캐비닛』 김언수/ 문학동네
이 소설 속에는 도시에서 인간답게 살기 어려워 아에 변종으로 진화해버린 이들이 가득하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172일 동안 내리 자다 깨어난 사람, 고양이로 변신하려는 사람. 증상은 SF적이지만, 이들이 변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고통은 리얼리즘 그 자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보호색을 띨 필요도 없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한 발짝 물러난 그곳에서 그간 어디가 아팠는지, 얼마나 가까스로 안 아픈 척했는지 깨달아야 한다. 책 속의 상처받은 변종 인간들과 동행하면 그들이 당신의 여행길에 증언해줄 것이다. 이제 좀 덜 아파도 된다고. 좀 더 당신을 위해도 괜찮다고.

『그해, 여름 손님』 안드레 애치먼/ 잔
여행지에서 폭풍처럼 빠져들어 읽기 좋은 책으로 연애소설만 한 것이 없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이고 포근한 사랑 말고, 사랑하는 만큼 상처 주고 상처받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의 원작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이 바로 그렇다. 이 책을 훌륭한 퀴어 소설로만 묶어두는 것은 게으르고 편협한 독서일 것이다. 어느 한 시절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폭풍 같은 사랑, 상대가 너무 아름다웠기에 버려질까 봐 단 한순간도 마음 졸이지 않았던 적이 없는 사랑 이야기이다. 여행이란 늘 생각보다 빨리 끝나버려서 아쉽듯이, 마침내 이런 미친 연애에도 끝이 온다. 그러나, 결코 사라지진 않는다. 여행의 추억도, 모든 걸 쏟아부은 사랑의 화인도.

『비행기에서 10시간』 박돈규/ 북오션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장거리 여행을 앞뒀다면 이 책을 상비약처럼 준비하길 바란다. 비행기에 대해 잘 모를 땐 저자의 표현처럼 이코노미석이 그저 ‘0.24평의 작은 감옥’일뿐이지만, 잘 알고 구석구석 즐기는 법을 터득하면 하늘 위 오락공간이 된다. 평소엔 불그죽죽 걸쭉해서 별로 당기지 않던 토마토주스가 비행기 내 베스트 음료라는 사실을 아는가? 비행기마다 좌석 ‘명당’이 모두 다른데, 비행기 내부도를 미리 보고 현명하게 좌석을 택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이 책을 완독하면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길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조차 또 다른 여행지처럼 느껴질 테니까.

『자전거여행』 김훈/ 문학동네
여행길 독서 중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은 ‘챙겨간 책이 도통 재미가 없을 때’와 ‘새 책 살 곳도 없는데 가져간 책을 다 읽어버렸을 때’이다. 이 책을 챙겨가면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명문장가로 꼽히는 김훈 작가가 자전거로 전국을 누빈 기록을 담은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절경이다. 내가 살아온 땅이, 삶이, 계절이 얼마나 깊고 너른지, 읽다가 자꾸만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게 될 것이다. 『자전거여행』은 끝나지 않는 책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갔다가도 뇌리에 선명하게 꽂힌 김훈의 문장들을 찾으러 다시, 또다시 맨 앞에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북하우스
오대양 육대주 안 다닌 곳이 없는 베테랑 여행작가 오소희의 수많은 여행서들 가운데서 첫 손에 꼽는 것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여행지는 ‘사람’이다. 세계를 떠돌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잊을 수 없는 이야기, 각각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저마다의 놀라운 사랑들은 여행 중에 ‘내 눈앞의 한 사람’에게 무한한 애정과 호기심을 갖게 한다. 역설적으로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를 거울처럼 비춰준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 꼬였던 심사, 사랑에 비겁했던 마음들을 따스하게 녹여주고, 우리는 사랑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토닥여준다.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이슬아/ 헤엄출판사
한 달 구독료 만 원을 내면 매일 에세이를 이메일로 보내주는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의 주인공 이슬아 작가는 하루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몸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수습하기 난감한 일들이 벌어져도 그는 날마다 쓴다. 매일 스스로와 약속한 일을 해내고야 마는 자의 저력과 무서운 성실성이 그의 문장마다 박혀 있다. 이 책은 매일을 새롭게 살아가고 빛나는 시선으로 기록하는 창작자 이슬아에게 영감과 용기가 되어준 18권의 책들에 대한 독서 에세이이다. 사노 요코, 박완서, 마르케스 등 대작가의 이야기가 이슬아라는 젊고 빛나는 창작자의 내면에 스며들어 완전히 새로운 풍경과 정서를 빚어내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이 작은 책을 여행길에 들고 가는 것은 18권의 엄선된 책들이 꽂힌 서가를 통째로 여행 가방에 넣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아트북스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현실 사이에 끼여서 가끔 마음이 따끔따끔하다. 화가 고흐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고흐는 언제나 절박한 돈 문제와 너무 아름다운 꿈 사이에 짓이겨져 있었다. 고흐의 서간집인 이 책은 루저, 무능력자, 사회 부적응자로 매도당했던 고흐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창작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약속하고 설득하고 절규하는 이야기이다.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길에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이해받지 못했던 예술가가 쓴 이 아름다운 편지들은 곧장 당신의 가슴으로 송신되어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이연실(@promunhak)문학동네 편집자

김훈의 『연필로 쓰기』, 이슬아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요조, 임경선의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허지웅의 『버티는 삶에 관하여』 등의 책을 편집했다. 유럽 서점 기행, 중국 서점 기행, 일본 도쿄 서점 기행을 다녀왔고, 낯선 곳에 가면 서점을 찾는 버릇이 있다. 에디터 박주선

#펜션, 풀빌라#강원도 홍천군#경기도 가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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